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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이반 투르게네프

게시자: 성우넷, 2018. 7. 18. 오전 11:44   [ 2018. 7. 18. 오전 11:44에 업데이트됨 ]




아직은 인간의 발자취가 없었노라,
융프라우에도 
힌스테라아르호른에도 

   알프스의 정상… 기암절벽의 연봉… 첩첩산중의 한복판
   태산 준령 위엔 맑게 갠 연록색의 말없는 하늘.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응고된 눈. 그 눈을 뚫고 우뚝 솟은 얼음에 덮이고 비바람에 그을은 준엄한 암괴.
   지평선 양쪽에 우뚝 마주 솟은 두 거봉, 두 거인― 
   융프라우와 힌스테라아르호른.
   융프라우가 이웃에게 말한다:
   ―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소? 당신이 나보다는 잘 보일거요. 하계의 모양은 어떻소?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흐른다. 이윽고 힌스테라아르호른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 밀운이 지면을 덮고 있소…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깐 사이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 자, 지금은 어떻소? ― 융프라우가 묻는다.
   ― 이번에는 보이는군. 하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소. 얼룩지고 자질구레하오; 물은 푸르고 숲은 검고 쌓아올려진 돌 더미들은 잿빛이오. 그 주위에선 여전히 딱정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소. 아직도 당신이나 나를 더럽힌 적이 없는, 저 두 발 달린 벌레들 말이오. 
   ― 인간들 말인가요?
   ― 그렇소, 그 인간들 말이오.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흐른다. 
   ― 자, 지금은 어떻소? ― 융프라우가 묻는다.
   ― 벌레들이 좀 적어진 것 같소, ― 힌스테라아르호른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 하계가 전보다는 선명해졌소; 물이 줄고 숲도 성글어졌소.
   잠깐 사이에 다시 수천 년이 흐른다.
   ― 무엇이 보이오? ― 융프라우가 묻는다.
   ― 우리들 근처는 아주 깨끗해진 것 같소, ― 힌스테라아르호른이 대답한다.
   ― 그런데 저 먼 계곡 사이에는 아직도 얼룩이 남아있고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소.
   ― 지금은 어떻소? ―  다시 잠깐 사이에 수천 년이 지나자 융프라우가 묻는다.
   ― 이제야 좋아졌소, ― 힌스테라아르호른이 대답한다.
   ― 어디나 깨끗하오, 어딜 보나 새하얗소… 보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눈뿐이오. 눈과 얼음이 고루 깔려 있소. 죄다 얼어버렸소. 이젠 됐소, 마음이 놓이는군요.
   ― 잘 됐군요 ― 융프라우가 말한다. ― 그건 그렇고 우리도 꽤 지껄였으니 이젠 한잠 자도록 합시다, 노인.
   ― 그럽시다.
   거대한 산들은 잠든다; 맑게 갠 푸른 하늘도 영원히 입을 다문 대지 위에 잠든다.
 
(1878년 2월)

김학수 옮김
사진 
Soller 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