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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첫눈에 반한 사랑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게시자: 성우넷, 2018. 7. 18. 오후 4:51   [ 2018. 7. 18. 오후 5:02에 업데이트됨 ]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런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들은 확신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하고 중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들리던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하는 무뚝뚝한 음성을
나는 대답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히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훨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비록 두 사람이 읽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암시와 신호가 있었다
아마도 삼년 전,
또는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펄럭이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유년 시절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사진 저작권  eduardo.b

선택의 가능성들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게시자: 성우넷, 2018. 7. 18. 오후 4:50   [ 2018. 7. 18. 오후 4:50에 업데이트됨 ]




영화를 더 좋아한다
강가의 떡갈나무들을 더 좋아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자신보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고 다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것을 비난하는 것이 곧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예외를 더 좋아한다
일찍 떠나기를 더 좋아한다
의사와 다른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한다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어리석음보다
시를 쓸 때의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해마다 맞이하는 특별한 기념일이 아닌
사랑으로 모든 날들을 기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도덕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너무 쉽게 믿는 친절보다
사려 깊은 친절을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당하는 나라를 더 좋아한다
약간 주저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질서 잡힌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1면보다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들을 더 좋아한다
꼬리의 일부를 잘라내지 않은 개를 더 좋아한다
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말한 많은 것들보다
여기에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더 좋아한다
별들의 시간보다 벌레들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더 오래, 그리고 언제라고 묻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진 안단테

두 번은 없다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게시자: 성우넷, 2018. 7. 18. 오후 4:48   [ 2018. 7. 18. 오후 4:49에 업데이트됨 ]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여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사진  zenity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게시자: 성우넷, 2018. 7. 18. 오후 4:47   [ 2018. 7. 18. 오후 4:48에 업데이트됨 ]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 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 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사진 dave nit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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