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 -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

게시일: Jul 19, 2018 12:6:11 AM

1


그들은 지구의 둥근 네 귀퉁이에

마주 보며 서 있다.

하늘나라 군대에서 쫓겨난

네 명의 마왕들.

지구의 네 귀퉁이에는

구름이 끼어있고

묵직한 자물쇠 네 개가 걸려있다.

해묵은 기념비의 그림자가

햇볕 쏟아지는 길 위에 누워 있다

징역의 시간에서

춤추는 시간으로,

장미의 시간에서

독사의 시간으로,

웃음의 시간에서

증오의 시간으로,

희망의 시간에서

절망의 시간으로,

그리고 그 절망의 시간에서

피가 맺는 죽음의 시간까지는

단 한 발자국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목숨의 대행진.

수많은 세월들을 지나가면서

샌드페이퍼 위의 손가락처럼

우리가 울며 보낸 숱한 나날이

일 년 열두 달 계속되었다.

오늘도 나는 그 기념비 주위를 서성거린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며

묵시록의 멍에로부터 흘러 나오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대의 얼굴에 비석 그림자가 스칠 때까지

아양부리는 물을 생각하리라.

그것은 장미의 시간이다.



2


부탁한다 아들아,

분수대 위로 뛰어 올라가

나에게 읽어다오.

그 돌의 책장 위에 씌어진 글자들을.

첫 번째 복음서를 쓴 사람은 마태오

그러나 우리 중의 그 누가

진실로 기뻐하며

그의 생애에 단 한 자라도

높이를 보탤 수 있겠느냐?

두 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성 마르코

그는 등불을 등경 위가 아니라

곡식 담는 말 아래 두려고

가져왔단 말이냐?

그리고 루키는 어떠했는가?

그의 눈은 육신을 밝히는 촛불,

그것도 수많은 육신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에는 많은 독수리들이 모여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이 사랑하시던

성 요한은 어떠했는가?

그는 무릎 위에

뚜껑이 닫힌 책을 올려놓고 있다.

그래 됐다 아이야,

그 책을 펼치거라.

필요하다면 네 이빨을 써서라도.



3


나는 올사니 변두리의

성 로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허벅다리에 가래톳이 생기는 Plague(페스트)가

Prague(프라그)에 창궐햇을 때,

그들은 죽은 자들을 그곳으로

데려오곤 했었다.

그들은 송장을 겹겹으로 쌓아 올렸다.

여러 해가 지난 뒤 그 뼈무덤은

썩어가고 석회질과 흙 속에서

천천히 타오르는

엉성하게 쌓아 올린 장작불 같아 보였다.

나는 오랜 시간을 걸어서

그 풍경을 둘러 보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삶의 감미로운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인간의 따스한 숨결을 좋아하고,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 갈 때에도

여자들의 머릿카락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에 매혹된다.

해질 무렵이면 나는

올사니 주막집 계단 앞에서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세상을 비웃는 술노래를 부르며

무덤을 파고 시체 나르는 인부들의 노랫소리에.

그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

그 노래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마지막에는 무덤 파는 인부들까지

그 속에 묻히고 말았으니까.

류우트와 가벼운 깃털을 들고

봄이 우리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교회의 들 남쪽 구석에

활짝 핀 벚꽃 나무로 걸어가면서

꽃봉오리와 섬세한 부드러움에 매혹되었다.

아가씨들이 양말끈을 의자 뒤로 던지는 순간

나는 처녀들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그 의자까지의 길은 너무 멀구나,

내가 그곳까지 가려면

5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4


가끔 나는 나무로 만든 종탑 가까이 가서 섰다.

…… 그 종탑도 이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말라스트라나 공동묘지에 있는

제국(帝國)의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동상들을 그곳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사자(死者)들을 슬퍼하면서,

그들은 떠나갔다, 천천히 걸어서 이곳을 떴다.

홀로 웃으면서, 시대의 뒤떨어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한데 그들 중에는 여자만이 아니라서

병사들도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투구와 무기까지 갖춘…….

나는 그곳에 오래 있지 않았다.



5


그 누구도 네가 생각에 잠기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페스트는 여기서 끝났다.

이 문으로 나오는 숫한 관들을

나는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출입구는 아니었다.

페스트는 아직도 창궐하고 있으며,

의사들은 공포를 막고자 그 병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페스트는 예전과 다름없이 죽음일 따름,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하찮은 미물조차 피할 수 없는 전염병이다.

내가 창 밖을 내다 볼 때마다

비쩍 마른 말들이 관을 실은

불운의 마차들을 끌고 지나갔다.

이제는 조종이 울리지 않는 대신

사람들이 지붕 위의 십자가에

칠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노간주나무 연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6


저녁이면 우리는

율리안노프스키 언덕에 눕곤 했었다.

도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멀지 않은 강물의 역류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에,

개구리들은 울기 시작했다.

언젠가 젊은 집시 한 사람이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지낸 일이 있다.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는 반만 잠겨 있었고,

손금을 보고 운명을 점칠 줄도 알았다.

- 당신은 쉰 살을 못 넘기겠어요.

그녀는 아루투스 체르니크에게 말했다.

- 당신도 쉰 살을 넘기지 못하겠군요.

- 나는 점을 치고 싶지 않았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새 내 손을 움켜쥐고

성난 목소리로 이를 갈면서 말했다

- 당신은 오래 살겠소!

그것은 그녀의 복수였고,

내게는 저주였다.



7


나는 너무나 많은 14행의 시와 단시들을 써 왔다!

전쟁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일어났고

나는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단 여인들에게

연애시를 속삭였다.

조금은 부끄러워 하면서

아니, 실은 부끄러워 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꿈결 속에 있을 때

잠든 무릎 사이로 나는

시의 꽃다발 한 묶음을 바쳤다.

그 꽃다발은 레이스에서 이긴

자동차 경주자들에게 주는 월계수 화환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분수대 계단에서 만났다.

그러고는 서로 어긋난 시간 때문에

어긋난 길을, 어긋난 방향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당신의 발끝이나마 한번 보았으면,

하는 소원이 간절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당신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의 두 눈을 들여다 보았다고 믿는다,

그것도 오직 한번.



8


요오드팅크에 적신 약솜이

내 등에 세 번 발라졌다.

내 등은 황갈색으로 변했다.

마치 화려하게 꾸민 코끼리 열차가

간선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에

사원(寺院)의 계단에 서 있던

세 인디언 공주의 얼굴색 만큼이나.

그 세 여자 중에 하나,

제일 예쁜 가운데 공주가

맙소사,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지금 나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수술대 위에 눕혀져 있는데

턱없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건

이 무슨 넌센스일까.

그들은 이미 불을 밝혔다.

외과 의사가 수술칼을 들이대고

내 몸을 단호하게 내리 그었다.

나는 갑작스레의식이 돌아 왔으므로

황급히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 순간 나는 삭막한 마스크 너머로

한 여인의 눈동자를 얼핏 보았다……

그래서 나는, 안녕! 눈빛 밝은 여인이여

하고 미소지어야만 했다.

그들은 이미 내 혈관을 졸라매고

절개한 부위를 열어젖힌 뒤였고,

그래서 외과 의사는 내 척추의 뼈와 마디들을 드러내고

뒤틀린 살덩어리를 떼어낼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옆으로 눕혀진 나는

두 손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었는데

머리맡에 선 간호원이

자기 무릎으로 내 손을 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한사코 움켜잡았다.

마치 잠수부가 물 위로 솟아오를 때

가냘픈 산소통에 한사코 매달리듯.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마취 주사가 내 혈관에 홍수처럼 밀려들었고,

내 몸의 관절들이 축 늘어졌다.

수술실의 불빛이 머리 위에서 흔들거렸지만

그 뒤에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귀여운 누이야,

나 때문에 네 얼굴이 파랗게 질렸구나.

제발 나에게 화내지 말아다오.

뜨거운 심장으로 말하노니,

내가 그 아름다운 트로피를 잠깐밖에 만져보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잠깐이라도 만져보지 않았느냐, 누이야.



9


이 모든 것이 어찌하여

백발과 지혜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으냐?

생명의 나무등걸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 따위는 항상 존재해 왔지 않느냐?

주검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린 후

기념비는 허공으로 곤두박질쳤고,

네 명의 담대한 시인들은

자신들의 책, 그들 나름의 베스트셀러를

그 잔해에 기대어 쓰곤 했었다.

분수대는 지금

당배꽁초가 흩어진 채 말라 버렸고

태양만이 슬그머니

흩어진 돌더미의 슬픔을 비춰주고 있다.

아무나 그곳에 마음 편히 애걸하러 갈 수 있다.

그러나 내 목숨을

그처럼 부질없이 내던지는 행위,

그것만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10


최악의 사태가 내 등 뒤에도 도사리고 있다.

…… 스스로 다짐하거니와

나는 이미 늙었다.

최악의 사태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당신이 꼭 알고 싶다면 말해주마

나도 행복한 적이 있었노라고.

때로는 온종일을, 때로는 한 시간을, 때로는 단 몇 분간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평생동안 사랑에 열중했었다.

그런데 한 여인의 두 손이 날개 이상의 그 어떤 것이라면,

그녀의 두 다리는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여인의 다리 힘을 시험하기를 좋아한다.

여인의 두 다리가 나를 짓누를 때도 그녀는 상냥하기만 했다.

그러니 여인들의 무릎으로 하여금 내 머리통을 깨부수게 하라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니까!

그 순간에 내가 두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이토록 흥분되지도

내 피가 이토록 관자노리에서 격렬하게 고동치지도 않을 텐데,

그러나 나는 왜 눈을 감아야만 하는가?

두 눈을 번쩍 뜬 채

나는 이 국토를 방랑한 적이 있었다.

이 국토는 당신들도 알다시피 참으로 아름답다!

아마도 이 국토는

여인들에 대한 내 사랑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한 그 무엇으로

일생동안 나를 사로잡아 왔었다.

내가 굶주렸을 때

이 국토가 불러주는 노랫가락은

내 나날의 양식이 되어주곤 했었다.

이국으로 망명하여 흩어진 자들

그들도 지금쯤은

이 세상이 끔찍스럽다는 것을 알 테지!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그 아무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이 국토의 무릎으로 하여금 내 머리통을 깨부수게 해 주소서!



11


아래의 표는 유형별로 소개된 미사일 목록이다.

지…대…공

지…대…지

지…대…함

공…대…공

공…대…지

공…대…함

함…대…공

함…대…함

함…대…지

도시는 밀폐되고, 나는 댐을 넘쳐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

사람들은 춤추면서, 그네들 머리 위를 나는 비행체가

손을 통해 창문마다 보내지는

음탕한 키스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입…대…눈

입…대…얼굴

입…대…입

하는 식으로

그 어떤 손이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자기의 목표물 하나를 찾아낼 때까지 계속될……



12


바느질통과

그녀의 모피 슬리퍼 리본 사이의

가정의 보잘것없는 시야 속에서,

그녀의 뱃속에 든 따뜻한 달(月)은

얼마나 빨리 자라고 있는가.

아직도 얼어붙은 꽃들 뒤에서

참새들은 양귀비 씨를 쪼아대고 있지만

그녀는 종달새 지저귈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카모밀라 국화가 즐거운 동굴 속에서는

누군가가 조그마한 심장으로

벌써 봄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 심장은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좋은 시절을 지켜줄 것이다.


사진 czechian